athraustos
운명과 종교적 연관 그리고 죄 본문
그리고 그는 운명을 종교적 연관 ―운명은 죄와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탈각시키기 위해 그리스 고전기에 형성된 운명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 통용된 운명은 단지 늘 ‘불행한 운명’으로만 등장하며, 이는 죄를 지어 신(들)의 노여움 을 샀으므로 마땅히 치러야 하는 대가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벤야민은 이러한 운명 개념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맹점을 노출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이 운명이 죄 개념 Schuldbegriff과만 연관될 뿐, ‘무죄 Unschuld’ 개념, 나아가 ‘행복 Glück’ 개념과 맺는 관계를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벤 야민은 운명을 구성하는 개념이 유일하게 불행과 죄일 뿐이고, 따라서 이 운명 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애초부터 마련되어 있지 않은 이상, 이러한 운명 은 결코 종교적 질서에 속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104) 오로지 불행과 죄만이 통 103) Vgl. W. Benjamin: Schicksal und Charakter. In: Gesammelte Schriften Bd. 2-1. Frankfurt a. M. 1991, S. 173: “Soll also der Begriff des Schicksals gewonnen werden, so muß dieser reinlich von dem des Charakters geschieden werden, was wiederum eher nicht gelingen kann, als der letzte eine genauere Bestimmung erfahren hat. Auf Grund dieser Bestimmung werden die beiden Begriffe durchaus divergent werden; wo Charakter ist, da wird mit Sicherheit Schicksal nicht sein und im Zusammenhang des Schicksals Charakter nicht angetroffen werden.” (국역본 발터 벤야민: 운명과 성격. 실린 곳: 발터 벤야민 선집5. 최성만 옮김. 길 2008, 68면 참조: “따라서 운명의 개념을 얻으려면 이 운명 개념이 성격 개념과 순수하게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성격 개념이 보다 엄밀하게 규정되기 전에는 성공할 수 없다. 이 규정을 근거로 그 두 개념은 전혀 상이한 것이 될 것이 다. 성격이 있는 곳에는 운명은 틀림없이 없을 것이고, 운명의 연관 속에서는 성격이라는 것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104) Vgl. W. Benjamin: Schicksal und Charakter. In: a. a. O., S. 173 f.: “So wird, […], das schicksalhafte Unglück als die Antwort Gottes oder der Götter auf religiöse Verschuldung angesehen. Dabei aber sollte es nachdenklich machen, daß eine entsprechende Beziehung des Schicksalsbegriffes auf den Begriff, welcher mit dem Schuldbegriff durch die Moral mitgegeben ist, auf den Begriff der Unschuld nämlich, fehlt. In der griechischen klassischen Ausgestaltung des Schicksalsgedankens wird das Glück, das einem Menschen zuteil wird, ganz und gar nicht als die Bestätigung seines unschuldigen Lebenswandels aufgefaßt, sondern als die Versuchung zu schwerster - 40 - 용되는 영역이란 다름 아닌 ‘법 Recht’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 은 형벌을 받도록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도록 심판 Das Recht verurteilt nicht zur Strafe, sondern zur Schuld”하면서 “살아 있는 것의 죄 연 관 Schuldzusammenhang des Lebendigen”으로, 즉 심판받은 삶으로 밀어 넣는 신화적 잔재에 불과하다.105) 반면 성격 Charakter은 죄 연관 속에 놓인 인물을 그 “신화적 노예상태 mythische Verknechtung”로부터 구출하여, 이 인물에게 “창조적 정신의 대답 die Antwort des Genius”을 제공하는 존재로 묘사된다.106)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벤야민은 신화 혹은 신화적인 것에 내재한 폭력 적 속성을 법이나 운명, 죄와 같은 개념과 결부하여 비판적으로 논구한다. 그런 데 이러한 논의는 곧바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식의 신화 폐지론으로 이어 지지 않는다. 특히 괴테의 친화력 Goethes Wahlverwandtschaften(1924/1925) 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벤야민이 신화를 그것이 지닌 폭력적 속성 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계속 참조하고 함께 대결을 벌여야 할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암시한다. 이 관계[신화와 진리의 관계]는 상호 배제적인 관계이다. 신화 속에는 어떠한 진 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 속에는 어떤 것도 명료하게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오류조차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를 초월해서는 진리 또한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에(원래 객관성 Sachlichkeit은 진리 속에 머물러 있듯이 진리는 오직 사상[事象]들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화의 정신에 관해서는 단 하나의 인식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리의 현전이 가능하려면 그것은 오직 신화 Verschuldung, zur Hybris. Beziehung auf die Unschuld kommt also im Schicksal nicht vor. Und - diese Frage trifft nocht tiefer - gibt es denn im Schicksal eine Beziehung auf das Glück? Ist das Glück, so wie ohne Zweifel das Unglück, eine konstitutive Kategorie für das Schicksal? Das Glück ist es vielmehr, welches den Glücklichen aus der Verkettung der Schicksale und aus dem Netz des eignen herauslöst.” (국역본 발터 벤야민: 운명과 성격, 69면 참조: “[…] 운명적인 불행[은] 종교적 죄지음에 대한 신 또는 신 들의 대답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때 그에 상응하는 관계로서 운명 개념이 도덕을 통해 죄 개 념과 함께 주어졌던 개념, 다시 말해 무죄 개념과 맺는 관계는 빠져 있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운명사상이 그리스 고전기에 형성됐을 때를 보면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복은 전혀 그의 무 죄한 삶의 역정에 대한 확인으로 파악되지 않았고, 오히려 가장 무거운 죄지음인 교만(Hybris) 으로의 유혹으로 파악되었다. 무죄에 대한 관계는 따라서 운명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는 물음은, 과연 운명 속에 행복에 대한 관계가 있느냐이다. 행복은, 불행이 의 심할 여지가 없이 그렇듯이, 운명에 대한 구성적 범주인가? [아니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을 운명의 연쇄와 그의 운명의 그물망에서 풀어내주는 것이 행복이다.”) 105) Vgl. W. Benjamin: Schicksal und Charakter. In: a. a. O., S 175. 106) Vgl. W. Benjamin: Schicksal und Charakter. In: a. a. O., S. 178. - 41 - 에 대한 인식, 즉 신화는 진리에 대해 파괴적일 만큼 무심하다는 인식이 전제될 경우에만 가능하다.107) (인용자 강조) 이처럼 벤야민에게서 신화란 진리를 위해 지양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존재라 기보다, 오히려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스스로 침잠하고 또 그로부 터 ‘깨어나야 할’ 꿈과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그리고 벤야민은 신화를 산만한 ‘원시림’의 세계―생각들이 로고스라는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서지 못하고 휙휙 건너 뛰어다니는 세계108)―에 비유하면서, “지금까지 광기만이 무성하게 자라온 영역을 개간하는 일. 원시림의 심연으로부터 유혹해오는 공포의 재물이 되지 않 기 위해 좌도 우도 돌아보지 않고 갈고 닦은 이성의 도끼를 들고 헤쳐 나갈 것”109)을 강조한다. 이처럼 벤야민의 작업은 기존 사회와 역사에 드리워진 신화 의 힘을 이성을 통해 조율하여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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