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hraustos
벤야민의 신화적 폭력과 인간의 정치적 실존 본문
“1914년 8월 첫 주의 어느 날 반전 데모를 준비하던 중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하인레와 그 의 약혼녀 리카 젤리그손이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 마지막 항의로 전쟁 반대 여론을 환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벤야 민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지면서 벤야민 은 대학 내에서의 모든 정치 활동을 중단”90)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 다. 연일 계속되는 연대요청에 대해서도 벤야민은 일관되게 거부 의사를 표했 다. “그는 이런 유의 ‘극단주의가 그냥 제스처’밖에는 되지 못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런 제스처보다 ‘더 강하고 더 순수하며 더욱 눈에 보이 지 않는’ 무엇91)이 필요했던 것이다.”92)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결과 수립된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은 당시 법과 국가를 사유하던 학자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이론적으로 확고히 정초해야 할 공통의 관심사였다. 특히 당시 독일의 보수적 공법학자이자 정치학자였던 칼 슈미트 Carl Schmitt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신생 공화국이 정당한 정치체제 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거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 치신학 Politische The logie(1922)에서 그 근거로 ‘주권자 Souverän’를 호출해 낸다. 슈미트는 “모든 근대적 법치국가의 발전 경향이 주권자를 제거하는 방향 으로 진행되어 왔다”93)고 비판하면서, 인간의 정치적 실존에서 극한적 ‘예외상 황 Ausnahmezustand’이 완전히 제거될 수 있는지 여부를 의문시한다. 그리고 그는 예외상황이란 인간의 의지나 조건과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들이닥칠 수 있는 정치적 혼란이라는 전제하에, 이로부터 국가를 수호해 줄 강력한 의지의 행위자, 즉 주권자가 요청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이렇듯 칼 슈미트에게 있 어 주권자란 예외상황 마저도 주관하는 절대적 존재로 자리매김 된다.94) 반면 90) 몸메 브로더젠: 발터 벤야민. 이순예 옮김. 인물과사상사 2007, 29-30면. 91) ‘더 강하고 더 순수하며 더욱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의 예로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벤야민의 독특한 언어관과 관련해 상술된다. 92) 몸메 브로더젠: 발터 벤야민, 31면. 93)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Vier Kapitel zur Lehre von der Souveränität. Berlin 1985, S. 13: “Alle Tendenzen der modernen rechtsstaatlichen Entwicklung gehen dahin, den Souverän in diesem Sinne zu beseitigen.” (국역본 칼 슈미트: 정치신학. 김항 옮김. 그 린비 2010, 18면.) 94) Vgl. Carl Schmitt: a. a. O., S. 12 f.: “Er[Souverän] entscheidet sowohl darüber, ob der extreme Notfall vorliegt, als auch darüber, was geschehen soll, um ihn zu beseitigen. Er steht außerhalb der normal geltenden Rechtsordnung und gehört doch zu - 36 - 벤야민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그러지고 이중적인 주권자의 형상을 그려낸다. 독 일 비애극의 원천 Ur 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1928)에서 묘사되는 군 주, 즉 주권자 Souvarän의 모습은 자신의 “지배 권력과 지배 능력 사이의 불일 치 Die Antithese zwischen Herrschermacht und Herrschvermögen”95)를 보여 주는 한 인간의 형상과 다름이 없다. 그는 예외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권 력을 이용하지만 “그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거대한 자연사의 흐름 속에서 희생 될 수밖에 없는 순교자”로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고 자 그의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함으로써 순리를 거스르는 폭군”으로도 묘사된 다.96) 그리고 이처럼 주권자 안에 극단적으로 상반된 두 가지 면모가 혼재하고 있음이 시사하는 바는 인간이 다름 아닌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피조물성 Kreatürlichkeit―이다. 피조물 상태는 어떠한 고군분투를 통해서도 세계와 자연 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가장 원천적인 제약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처럼 벤야민은 예외상황을 주권자의 법이 작동하지 않는 곳에 위치시킴으 로써 법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공백을 마련한다. 나아가 이러한 틈은 법의 전 적인 지배를 의문시하게끔 한다. 또한 폭력비판을 위하여 에서 논의의 흐름은 폭력적 지배를 법97)의 이름으로 합리적인 것이라 윤색하던 당대 법실정주의나 자연법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벤야민은 ‘법의 지배 Herrschaft des Recht’가 사실은 무고한 인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근본적인 권력관계를 재 생산해내는 ‘신화적 폭력 mythische Gewalt’에 불과하다고 언급한다.98) 그리고 ihr, denn er ist zuständig für die Entscheidung, ob die Verfassung in toto suspendiert werden kann.” (국역본 칼 슈미트: 정치신학, 18면 참조: “그[주권자]는 극한적 긴급상황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평정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이 주권자 는 통상적으로 유효한 법질서 바깥에 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 속해 있다. 따라서 헌법을 완전히 효력정지시킬 것인지 어떤지를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95) W. Benjamin: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In: Gesammelte Schriften Bd. 1-1. Frankfurt a. M. 1991, S. 250. 96) 임석원: 발터 벤야민의 알레고리 개념 연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석사학위 논문. 서울대 학교 대학원 2003, 34면 참조. 97) 법 Recht은 정의 Gerechtigkeit와 구분된다. 98) Vgl. W.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In: Gesammelte Schriften Bd. 2-1. Frankfurt a. M. 1991, S. 195-200: “Im ganzen Bereich der Gewalten, die Naturrecht wie positives Recht absehen, findet sich keine, welche von der angedeuteten schweren Problematik jeder Rechtsgewalt frei wäre. […] Weit entfernt, eine reinere Sphäre zu eröffnen, zeigt die mythische Manifestation der unmittelbaren Gewalt sich im tiefsten mit aller Rechtsgewalt identisch und macht die Ahnung von deren Problematik zur Gewißheit von der Verderblichkeit ihrer geschichtlichen Funktion, deren Vernichtung - 37 - 신화적 폭력은 신적 폭력과 대비되어 다음과 같이 상술된다.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인 폭력이 맞선 다. 그것도 후자의 폭력은 모든 면에서 전자에 대한 반대상을 가리킨다.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 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 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entsühnend),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 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99) (인용자 강조) 이처럼 신화적 폭력―법적 폭력―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설정하여 인간으 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그 선을 넘어 ‘속죄 Sühne’에 빠지게 하고, 따라서 단 순한 삶 das bloße Leben을 법에 속박해 삶의 희생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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